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규(1974)/선수 경력 (문단 편집) == [[일본프로야구|일본]]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2007~2009) ==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afe59aa7.jpg]]|| ||[[파일:a0114992_49ac178fd97ed.jpg]]|| 2006년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자 [[일본]]으로 진출, [[주니치 드래곤즈]] 와 3년 계약을 맺는다. 사실 이병규의 일본리그 진출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과연 갈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는 견해가 많았는데, 직전 시즌 성적이 상대적으로 평범했던데다[* 세이버나 타 선수와의 스탯을 비교해 보면 투고타저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은 시즌이라 절대 평범하진 않았다.] 이병규의 스타일 자체가 흔히 외국인 타자에게 기대하는 슬러거 유형도 아니었기 때문. 심지어 팬들 중엔 FA 몸값 올리려고 [[언플]]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2006년 즈음 주니치 쪽에서 "오랫동안 이병규를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고, 실제로 주니치에서 모셔가는 수준으로 계약에 성공했다.[*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활약 영상도 안 보고 뽑았다. 당시 이병규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이병규에게 주전 중견수라고 발표할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다. 이후 이병규가 부진했을 때도 오치아이는 그를 2군으로 강등하는 게 아닌 타순을 조정해 선발 출장 시키기도 했다.] 주니치 쪽에서 이병규를 원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2007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는 팀의 간판타자인 [[후쿠도메 고스케]]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한 상태라 외야에 공백이 생길 것이 예정된 상태. 중장거리 타자이고 운동 능력이 뛰어난 타입이라는 점에서 두 선수가 비슷한 유형이기 때문에 대체 선수로서의 매력이 있고, 적응기간 1년 뒤에는 후쿠도메의 자리를 메꿀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낼 것이라고 예상한 것.[* 다만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좌타 외야수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병규와 후쿠도메는 상당히 다른 유형이다. 이병규는 KBO에서 타율 대비 출루율이 낮은 대표적인 선수로 커리어 내내 한 시즌도 4할 이상의 출루율을 기록하지 못한 반면 후쿠도메는 MLB 진출 이전 NPB에서의 9년간 절반 넘는 5시즌의 출루율이 4할 이상이었다. 이 중 3회는 출루율 리그 1위일 정도로 높은 출루율이 강점인 선수였고 먹튀 소리를 들은 MLB에서의 5시즌 통산 타율도 0.258에 그쳤지만 출루율은 그보다 1할 이상 높은 0.359로 양호했다. NPB에서 3년간 타율 0.254, 출루율 0.290이었던 이병규와는 확연히 다르다.] 첫 시즌인 2007년에는 [[후쿠도메 고스케]], [[타이론 우즈]]에 이은 5번 타순에 배치되었는데, 초반에는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며 문제없이 일본 무대에 연착륙하는 듯 했으나 서서히 약점이 노출되면서 결국 .262 .295 .370 9홈런 46타점 WAR 0.4, wRC+ 78 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특히 이 해에 기록한 108개의 삼진은 이병규의 커리어 역사상 유일한 세자릿수 삼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37타수 6안타로 영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6안타 중에 5개가 장타였고 3홈런에 11타점이 있었으며 [[일본시리즈]]에서는 이 타점들이 영양가 만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주니치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꺾고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며 개인 통산 첫번째 우승을 맛보게 된다. 코나미컵에도 출전했지만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4타수 무안타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팬들은 이를 두고 조국(한국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의 성적을 내팽겨친 열사라고 칭하며 '라면병규 + 열사'를 합쳐 '라열사'라고 불렸으나, 정작 이병규는 결승전에서 구원으로 올라온 김광현을 상대로 쐐기 투런포를 때려내 주니치에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코나미컵이 주니치의 우승으로 끝나기도 했고, 김광현을 상대로 홈런을 치자마자 당시 [[국내야구 갤러리]]에서 순식간에 매국노인 [[이완용]]과 합성되어 '라완용'이라고 불렸다. 후쿠도메가 [[시카고 컵스]]로 떠난 2008년에는 이전 시즌보다 훨씬 많은 16개의 홈런과 65타점을 기록했지만, .254 .293 .416의 슬래시 라인은 여전히 낙제점이었고, 세부 스탯도 WAR 0.4, wRC+ 94로 좋지 못했다. 또한 수비 역시 필딩율 .983, FS -4.4, rRng -3.5로 작년에 비해서 현격히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http://npbstats.com/players/db/batting/?wdt_search=105457|출처]]][* 컨택은 2007년에 비해 저하돼 시즌 초에 팀 내 최저 타율 및 최다 삼진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오치아이 감독이 2군에 내리지 않았던 건 향상된 장타력 때문이었다. (다만 결국 낮은 타율에 부진이 길어지자 6월 중에 2군에 보내긴 했다.) 당시 나왔던 장타의 대부분이 쌓이고 쌓여 우리가 흔히 아는 [[라뱅쓰리런]]이 된 것이기 때문. 실제로도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외국인 타자에 대해 '현장에서 봤을 때 외국인 타자는 경기에서 임팩트를 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병규를 감싸는 의도의 인터뷰였던 셈. 2007년, 2008년 스프링캠프 모두 '이병규의 주전을 보장한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이 때 활약 덕분에 이병규는 재계약을 위해 2009 시즌 목표를 3할-20홈런으로 잡고 준비를 하게 된다.] 다만 WPA는 양수로 쳤다 하면 영양가는 만점이었다. 그리고 3년차인 2009년엔 별다른 부상이 없음에도 계속 2군에 상주하다가 1군에 올라와 단 3경기만을 뛰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이후 주니치 외야의 공백이 생기면 1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2군으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다 시즌을 마쳤다. 2009년 최종 성적은 타율.217 (101타수 22안타) 8타점 3홈런 으로 '''FA 먹튀 확정'''. 계약 만료 후 이병규 본인은 재계약을 원했으나 구단에서는 가차없이 거부한다. 그렇게 이병규는 주니치를 떠나게 된다.[* 본인도 한국 복귀시 '방출당한 게 아니라 그냥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일본에서의 통산 기록은''' 3년 동안 타율 0.254에 28홈런 97득점 119타점 OPS.676 WAR 0.5. wRC+ 84'''[* 이병규의 WAR은 KBO리그에서 일본프로야구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타자 중 손 꼽힐 정도로 낮은 편이다. 비슷한 클래식 성적을 기록하고 함께 일본 진출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종범]]도 3년+8경기 동안 WAR 6.3, wRC+ 103을 기록하며 용병으로는 부족해도 년 평균 1군 주전급이라 볼 수 있는 성적을 남겼으며, 1시즌과 31경기만에 돌아간 [[김태균]]은 WAR 2.0, wRC+ 112. 사실상 2군에만 있었던 [[이범호]]가 48게임 동안 WAR -0.2를 기록한 덕에 최하위를 면한 정도이다. 이외에 [[하재훈]] 역시 WAR -를 기록하면서 이병규보다 낮았고, 용병 쿼터는 아니지만 1군을 아예 못 밟은 [[신성현]]이나 송상훈까지 따지면 일본에서 이병규보다 실패한 선수가 없는 건 아니다.] [[http://npbstats.com/players/db/%ED%83%80%EC%9E%90/?wdt_search=105457|출처]]]한국에서도 볼넷을 많이 얻는 유형이 아니었지만, 일본에선 그 정도가 더 심해져 '''51볼넷 234삼진'''으로 삼진이 볼넷의 거의 5배에 달했다. 통산 출루율은 3할도 되지 않는 0.290로 '''1000타석 이상의 외국인 선수 중 역대 최저 출루율'''이란 불명예스러운 기록까지 세웠다.[* 현재는 2014-2017년에 뛰었던 [[루이스 크루즈]]의 출루율 0.273로 기록이 경신된 상태다.] 이병규가 일본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배드볼 히터인 이병규의 스타일 자체가 철저하게 약점을 파고들며 유인구 위주의 승부를 하는 일본 야구의 트렌드와 상극이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결국 이병규의 최대 무기였던 컨택 능력이 상위 리그인 NPB에서 쉽게 통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 NPB 2군 성적을 보면 KBO 리그에 나왔던 성적과 매우 흡사했으며, 매번 [[정민철|2군 폭격 → 1군 부진 → 2군 강등]] 패턴이 반복되었다. 사실상 수치로 봤을 때 수준차로 인한 실패가 분명한 셈.] 이러한 이유로 이병규가 팀에서 뛸 당시 주니치 팬들의 여론은 당연히 좋지 못했다. [[마쓰이 히데키]]가 양키즈에 입단할 당시 받은 금액과 필적하는 계약으로 데려온 선수였고, 중계권료는 전경기 출장시 3000만엔 정도로 연봉의 상당 부분을 한국 방송사가 책임진 [[이승엽]]과는 경우가 달랐던 데다가 입단 당시 주니치 계열의 일본 언론이 한국의 [[스즈키 이치로|이치로]]라고 선전을 하면서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 있었다. 여기에 주니치의 이전 외국인 선수였던 알렉스 오초아[* 리그 최고의 강견이라 평가받으면서 주니치의 중견수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타선에서도 적당한 장타력으로 후쿠도메와 우즈의 뒤를 받치는 5, 6번 타자로 활약했다. 주니치와 재계약에 실패한 이듬해인 2007년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해 2년간 준수한 성적을 낸 뒤 은퇴했다.]에 비해 공수 양면에서 너무나 떨어진 모습을 보인지라 그와 비교되어 폭풍처럼 까였으며, 일본 웹에서는 '칠 수 없고, 지킬 수 없고, 달릴 수 없는' 선수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돌아다녔다. 일본 넷 문화의 [[혐한]] 보정을 감안하더라도 만족할만한 성적은 아니었던 것.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임팩트 있는 활약이 있었고,[* 특히 07년 일본시리즈에서의 활약이 아주 좋았다. 이 때 차지한 우승이 53년 만의 우승임을 감안하면 임팩트는 더 컸다.] 팀에는 잘 융화했다는 점, 이후에도 [[이대호]]가 일본 진출할 당시에 해 준 조언 등이 번역되어 알려지면서 일본 야구를 존중하는 자세가 재평가되어 '''야구는 못했지만 성격은 좋았던 선수''' 정도의 평가로 정리되었다. 정말 여담으로 주니치에서 데려올 때 '''한국의 이치로'''라고 별명을 붙여주며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면서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렸는데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넷상에서는 '''한국의 이치로(웃음)'''이라는 굴욕적인 별명도 자주 회자되는 선수.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치로라면서 이치로의 상징인 타율은 2할5푼에 도루는 3년간 딱 한 개 성공했고 오히려 뜬금없는 장타력이 그나마 장점이었을 정도로 플레이스타일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더 임팩트가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